Saturday, August 7, 2010

진토에서 들어:왕상16:1-4에 대한 단상

지금까지 지내면서 내가 마음 먹은 대로 해본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결정하며 온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있다면 아내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평소에 기도해 오던 대로 신앙의 기준으로 그리고 내가 늘 그리던 여성상의 기준으로 선택하였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나의 그런 선택을 용인해 주셨다. 아마 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그리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외에의 삶의 모든 부분들이 타의반 자의반으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 왔다.

이것을 칼빈은 예정론이라 했던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의 삶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회상과 감사는 그래서 철이 든 지금에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안에서만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다. 대학을 선택하고 신학의 길을 간 것도, 내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이다. 미국행을 결정하고 막막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이다. 어느 것 하나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의 욕심을 아시고 그것을 꺾는 훈련부터 시키신 것 같다.

열왕기 기자는 바아사를 하나님이 ‘진토에서 들어’ 쓰신 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먼지와 흙 같은 존재 바아사… 그를 들어 쓰시겠다 결심하신 하나님은 결국 그를 왕으로 만드셨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수 있는 왕의 위치에 하나님은 너무도 쉽게 그를 옮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못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라는 우리의 옛 속담은 신앙인들의 삶을 제한시키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폄하시키는 말이다. 우리 신앙인은 쳐다보지는 못해도, 오를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이 필요하다. 늘 나약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는 늘 나무 그늘에 앉아 떨어질 열매만을 기다리는 자이다. 열매는 올라가서 따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바아사는 왕이 되었을 때,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자신은 진토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감격과 확신을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간직 하지 못했다. 역대 왕들의 전철을 똑 같이 밟기를 시작한다. 그는 왕이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유지 되는 줄 알았다. 나무에 오르기만 하면 평생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이 보장되는 줄 착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곧 잊어 버리고 말았다. 한번의 확신이 평생을 갈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매일, 아니 매 순간순간 마다 다시 새롭게 확신하며, 붙들지 않으면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마도 그것을 원하셨던 것 같다. 왕위 자체가 신앙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고 나아가는 그 노력과 열심이 우리의 신앙을 지탱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먼지와 흙 같은 존재 바아사… 먼지와 흙 같은 존재가 어찌 그 뿐이랴! 그러나 먼지와 흙에서 정금 같은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한 삶의 자세는 모두가 다 다르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따르며 사느냐에 따라 먼지와 흙 같은 삶을 사느냐 아니며 정금 같은 삶을 사느냐가 갈리게 될 것이다. 정금 같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결심,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이 아닐까?조금만 추워도 벌벌떨고 조금만 더워도 마구 벗어제치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 섞인 삶이 아니라, 추움과 더움에도 굴하지 않고 정금 같은 삶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