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2, 2010

“독일 통일준비 안해 16년간 고통"

“독일 통일준비 안해 16년간 고통"
[학술포럼] 獨 데펜호이어 교수 “한국통일 후유증 막대할 것”

남북한이 통일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을 경우 경제 침체 등 어려움이 장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남북한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통일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동서독이 통일 이전부터 서로 TV를 시청하고 교류하는 등 문화 등 다방면의 사회적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이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서로를 모르는 데다 특히 북한주민의 경우 남한 사회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함에 따라 통일 후유증이 막대할 것이므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서독, 경제력 과신하다가 16년간 고통”

19일 평화재단과 주한 콘라드 아데나워재단이 주최.후원으로 서울 중구 장충동 만해NGO교육센터에서 열린 ‘분단국가 간 통합에 따른 법적문제’ 포럼에서 오토 데펜호이어 독일 쾰른대 법대 교수는 “당시 동유럽에 비해 동독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성공적 모델을 구현하는 국가였지만 서독에 비하면 극도로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자신의 경제력을 과신해 통일비용 산정에 신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오토 데펜호이어 독일 쾰른대 교수 ⓒ 김홍국 기자


그는 이어 “동독에 대해 재정적 부담과 청산업무의 규모가 초기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고 특히 독일통일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공동의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해 부작용이 장기화됐다”고 지적했다.

데펜호이어 교수는 “만일 당시 서독 시민들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익적 사명감을 느꼈다면 더 많은 전문가 자원봉사자와 자문가가 나섰을 것이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며 “이런 상황 가운데 독일이 통일과정에서 갑작스럽게 구 소련이 몰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등 사태변화가 급진전되면서 사전 준비 없이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 몰려오는 등 부작용을 겪은 끝에 16년이 지난 현재에 겨우 회복됐다는 점에서 각 분야의 다양한 준비작업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독일 통일의 예는 한국이 크게 교훈을 삼아야할 것이라는 점에서 독일이 어떤 부분을 준비했고 어떤 부분에 대해 준비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할 것”이라며 “남북한은 정부와 기업, 공공기관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통일 이후의 사회구조와 문화, 정치경제적 균형성 등 닥칠 변화에 대비해 더 많은 준비를 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 데펜호이어 교수와 참석자들이 독일 통일의 경험과 남북한에 대한 적용을 놓고 토론에 열중하고 있다. ⓒ 평화재단


그는 또 “헬무트 콜 당시 독일총리는 훌륭한 정치가였지만 국민에게 이같은 상황을 잘 알리고 설득한 훌륭한 커뮤니케이터(소통자)는 아니었다”며 “통일이 되는 과정에서 또 정부 각 기관과 기업 및 국민들이 이같은 상황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한국에서도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들과 충분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데펜호이어 교수는 당시 통일독일 헌법을 준비하는 등 독일 법학 분야를 대표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헌법전문가로 인정받는 석학이다. 데펜호이어 교수는 이날 발표 및 토론을 통해 통일한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할 어려움과 법적 문제점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독일의 경험을 비교하는 등 호소력 있는 관점과 설명으로 참석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다음은 데펜호이어 교수의 발표내용.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통일. 엄청난 후유증과 어려움 불러와”

독일 통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된 뒤 개혁 개방에 따른 체제전환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나 전승국의 위치를 과함하게 포기하고 그런 수준의 개혁에 나설 것이라는 것은 당시 독일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 동독 정권을 소련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고, 누구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할 수 없는 상황이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순간이 이뤄졌다.


◀ 데펜호이어 교수는 통일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준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 평화재단


그래서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가운데 서독 정부가 이에 대해 어찌할 바 몰라하는 상황이 10일 정도 이어졌다. 이어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국가연합체 형태로 미래의 독일통일을 준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0개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동독 주민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면서 독일통일이 장기적으로 서서히 이뤄질 것이라는 서독 정부의 전망과 계획은 곧바로 종말을 고했다. 통일과정이 당초 계획한대로 천천히 가지 않고 급진전하면서, 동독사람들이 기다리지 않고 대량 탈출을 통해 서독에 밀려오게 된 것이다.

당시 구동독 주민들의 이주 물결 속에 가장 대표적인 시위 구호는 “독일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마르크화를 향해 가겠다”는 것으로, 이는 구호에 그친 정도가 아니라 서독과 통일에 대한 위협과도 같은 수준에 달할 정도로 강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누가 동독 주민이 무너뜨린 장벽을 세우며 서독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당시 콜 총리는 통일의 기회가 왔다고 보고 동독 주민에게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어떤 국가든 분단이 장기화됐을 경우 세 가지 극복과제를 안게된다. 첫째 이미 서로 달라진 경제체제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고, 둘째 양 국민들 간 마음속에서의 분단과 서로의 차이점에 대한 극복, 그리고 세 번째로 법적으로 차이점을 극복하는 과제가 있다.

“남북한 주민들 통일 과정에서 분단된 마음과 몸을 치유해나가야”

독일 통일 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든 것은 이제 더이상 비밀이나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당시 서독정부는 경제적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통일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주머니에 든 돈 정도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독정부는 화폐경제 사회통합에 나섰고 동독과 서독의 화폐의 교환비율을 1 대1로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재난과 같은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피해갈 수 없는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 데펜호이어 교수는 통일 과정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통일을 준비토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평화재단


당시 서독은 동독의 산업구조가 다 몰락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동독의 낙후된 공장에 돈을 투자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동독인들의 갑작스러운 실업과 생계 불안을 막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이는 어차피 다시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잃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투자해야 하는 돈이었고 서독은 결국 막대한 통일비용을 치르게 됐다.

과거 동독은 사회주의에 바탕해 모든 경제활동을 조정하는 통제경제였기 때문에 자유시장경제 체제였던 서독이 동독 경제를 총체적으로 떠안아야 했다. 특히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기업성과를 높인 뒤 민영화 작업을 해 매각했다.

일단 회생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기업은 매각했고, 회생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는데도 사겠다는 다른 기업이 안나타나면 정부가 투자를 했다. 낙후된 대기업의 경우 기업을 폐쇄하고 해산 절차를 거쳐 정리한 뒤 노동자들을 수용하는 회사를 설립, 실업과 고용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통일 이후 경제적인 상황을 요약하면 당시 통일 독일정부가 취한 경제조치들이 최선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정부는 주민들의 악화된 삶과 기업들의 어려움 극복하도록 도와야”

당시 동독주민들의 어려운 삶을 도와주는 것이 정부정책의 핵심 목표였다. 무리하게 서독과 동독의 화폐를 1 대 1로 교환비율을 정한 것도 주민들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조치였다. 지금도 동독기업들은 정부 보조금 혜택이 없으면 수익을 낼 수 없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충분히 지불할 만큼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동독에서는 아직도 일부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기업들이 이익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못하고, 동독 지역의 새로운 연방주정부들은 세원이 부족해 각종 인프라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돈이 없고 이로 인해 다시 일부 주민들은 서독으로 이주하려 하고 있다.

이같은 독일 경제의 문제점은 통일과 함께 세계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더욱 커졌다. 과거 서독은 엄청난 사회복지를 누렸지만 통일비용이 들어간 데다 동시에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의 등장으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임금이 낮은 국가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생산의 비용구조를 어떻게 효율화하느냐가 독일경제의 핵심문제가 됐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완벽하게 통일과정을 이루지 못했지만 법적인 측면에서는 한 번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한국도 법 제도의 정비에 대해 사전에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당시 법적으로 구 동독의 연방주들이 독일의 기본법 효력 범위 안으로 편입돼 효력을 발휘하도록 돼있었다. 그래서 90년 10월3일 독일 통일이 이뤄지면서 서독이 가진 기본법의 효력이 서독에 국한되지 않고 구동독의 지역까지 영향력이 넓어지면서 통일조약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통일조약이 45개항으로 조문이 다소 작다고 볼 수 있으나 별첨이 부속조항이 있어 효과적인 체제를 갖춘 셈이다. 기본법이 동독지역으로 확대 적용되면서 통일을 이룬 것 역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계획경제 체제의 북한 주민들 남쪽 상황 몰라 적응 어려울 것”

문제는 이같은 법의 통일이라는 측면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40년 넘게 살아온 동독주민들에게는 무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동독주민들은 자유가 뭔지,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고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통일과 함께 새로운 통일독일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서독에 사는 나를 자주 방문하는 동독친구는 최근 나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당시 독일은 한국과 달리 동독에서도 서독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해 서독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다 알고 있었는데도 “이제 자유가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90년초까지 알고 있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추상적으로 법 체제나 제도를 적용시키는 것을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실제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그 속에서 생활을 해야하는 사람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국도 아마 똑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남쪽 상황을 전혀 몰라 더 어렵게될 것이다. 독일의 경우 89년까지 40여년 분단됐지만, 한국은 분단이 50년을 넘었다.

한 민족이 떨어져 살면 그 분단의 흔적이 사회와 사람의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남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의 4룡으로 신흥공업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북한은 세계화가 뭔지 시장경제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래서 진정한 통일의 문제는 경제나 법전 속의 문제가 아니라 동서독과 남북한 주민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계획경제 아래 집단농장 체제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과 몸의 차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지도자는 국민들과 의사소통하는 훌륭한 ‘커뮤니케이터’가 돼야”

그렇다면 분단 국가들이 필연적으로 안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많은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 했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점에서 시간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양측의 차이는 줄어들고 같이 성장해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진부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세대별로도 볼 필요가 있다. 젊은 학생들은 통일 후 적응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40-60대는 적응에 힘들어했다. 60대 이상은 분단되기 전 통일 독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극복에 어려움이 없었다.

사회체제 측면에서 볼 필요도 있다. 체제를 떠받친 중심인물과 체제에 의해 희생된 불이익 층으로 나눠진다. 체제를 떠받친 사람은 경찰.군대.공산당 등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통일 이후 자신들이 누린 자리로부터 밀려났다. 체제를 떠받친 사람들도 세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체제의 중심에 있었지만 전문성을 가진 역사학과 교수 등 전문가집단은 자기 스스로 행동했다기보다는 체제하에서 일한 수동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들 전문가집단은 사회에 다시 수용됐다.

두 번째는 문제가 되는 행동을 했거나 전문가 아닌 사람들은 조기 퇴직시켰다. 세 번째로 체제하에서 심하게 부당한 일을 한 집단, 즉 발포명령, 사살 명령, 고문을 했던 사람들로서 이들은 형사법적인 소추 조치를 취했다. 그런 조치가 옳은지 아닌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구 체제하에서 희생과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을 옹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조치였다.

통일 후 15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통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이 극복됐고 많은 일들이 처리됐다. 구 동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구 동독지역을 가보면 15년 동안 얼마나 큰 변화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일인들은 문제가 있었고 작은 실수도 있었지만 큰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올 줄 알았다면 좀더 국민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통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이야기했다면 국민들의 불만과 어려움이 더 적었을 것이다.

당시 콜 총리는 훌륭한 정치가였지만 국민들과 의사소통하는 훌륭한 ‘커뮤니케이터(소통자)’는 아니었다. 알았다고 했다면 조금 더 나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국민과의 의사소통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출처] :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466

[글로벌포커스] 독일 통일 20주년의 교훈

기사입력 2010.08.23 17:02:56
오는 10월 3일 우리나라 개천절은 독일이 다시 통일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달 유럽 출장 기회에 통독 20년을 맞는 독일의 분위기도 살필 겸 베를린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독일의 재통일이 독일 국민에게는 무엇을 가져다 주었으며, 20세기의 가장 획기적인 일로 기록되고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의 국제정치적 함의는 무엇이며 또 천안함 사건으로 더욱 멀어져 보이기만 하는 한반도의 통일에 던져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어느 것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0ㆍ3 기념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베를린 주민들의 표정에서 특별한 반응을 읽기는 어려웠고 기념 현수막도 걸리지 않았다. 연방제 국가인 독일은 통일 기념식을 통일 첫 해에는 수도 베를린에서 개최한 후 매년 각 주를 순회하며 개최해 오고 있다. 올해에는 브레멘에서 20주년 공식 기념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아마도 10월 3일이 가까워 오면 다시 한번 당사국인 독일은 물론 전 세계 언론의 보도전쟁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선 통독 전후의 경제 사정과 통독 이후의 사회적 통합에 대한 옛 동독 국민의 반응을 살펴보자. 2009년에 독일 정부가 발간한 통일 백서에 의하면 옛 동독 지역의 경제 상황은 통일 이후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즉 통일 이전 서독의 30% 수준이던 동독의 GDP는 71% 수준까지, 생산성은 과거 20~25%에서 79%까지 높아졌다. 2000~2008년 연평균 GDP 성장률은 동독 지역이 14.1%로 서독의 9.1%를 앞서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 정부가 동독 지역 발전을 위해 매년 GDP의 3~4%(약 1000억유로)를 투입해 온 결과다.

그러나 통일의 핵심 요소인 사회 통합은 통일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이 국내외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난해 쉬드도이체 자이퉁지가 옛 동독인들의 통일 후 생활태도를 조사해 보도한 데 따르면 67%의 옛 동독인들은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대답은 단 11%에 불과하고 42%는 불만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10% 응답자는 옛 동독으로 회귀하기를 바란다고 응답해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통독의 기대가 고조되자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관련국들은 표면적으로는 독일 통일을 지지하는 공식적 입장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국가의 본심도 그랬을까. 통일 과정을 둘러싼 긴박했던 시기의 외교 기밀들이 지난해부터 관련국들의 외교문서 공개로 일부나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독일의 통일 가능성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영국 대처 총리였음이 밝혀졌으며 그는 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영국 등 서방진영은 독일의 통일을 원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이를 막아달라고 부탁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한편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도 반대 입장을 마지막까지 견지했지만 독일 통일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독일의 유로화 가입을 조건으로 찬성해 줬다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관련 기록들이 공개되면 통독 과정의 외교 비밀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베를린 방문을 마치면서 한반도의 현실로 생각이 돌아오자 마음은 더없이 착잡해졌다. 최근 우리 국민은 국내외적으로 험산준령을 넘었던 독일 통일과정을 보면서 남북 통일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 통일이 부지불식간에 다가왔듯 우리의 통일도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반도 주변 국제 정세는 대단히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 지도자들이 이런 국제 정세의 흐름을 얼마나 잘 읽어 내느냐에 우리나라의 명운이 달려 있다.

[임성준 한국외대 석좌교수]

“준비안된 통일은 재앙”...독일 통일 20년의 교훈

1990년 10월3일, 지구상에 몇 안되던 분단국가 독일이 통일을 선언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통일 독일은 세계 3위의 교역 대국이자 4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하지만 1000억 유로에 달하는 국가 부채, 10%가 넘는 높은 실업률, 여기에 활력을 잃은 경제 주체들까지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게 독일 스스로의 평가다.

독일 통일 20년을 맞이한 2010년, 또 다른 분단 지역인 한반도에서도 통일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8ㆍ15 축사를 시작으로 여야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 ‘통일세’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에다 북한의 불안한 3대 권력 세습과 맞물리며 한반도도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반도 통일의 해결책을 독일 통일의 과정과 결과에서 찾고 있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독일식 통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제 격차였다. 통일 직전 서독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9300달러, 동독은 5800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독은 이 차이를 무시했다. 같은 동포라는 감성에 휩싸여 1:1 화폐교환(당시 적정 환율은 4.4:1), 동독지역 임금의 일괄인상 등을 추진했다. 이는 옛 동독 지역의 물가 상승과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며, 지금도 독일 경제의 짐이 되고 있다.

정부는 매년 GDP의 4%에 달하는 돈을 통일 후속 작업에 쏟아붙고 있지만,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2등 국민이라는 차별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이 같은 심리적 문제는 두 지역의 경제 격차로도 이어지고 있다. 겉으로는 두 지역의 소득차나 임금 격차가 거의 사라졌지만, 옛 동독 지역은 전체 독일의 수치보다 2배 이상 높은 실업률, 그리고 기업 공동화와 인구 격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무력 충돌이 아닌, 양국 정치인과 국민들의 합의에 의한 평화 통일을 달성했고, 이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독일의 위상도 그만큼 올라갔기 때문이다. 한 때 유럽 지역에서 마지막 냉전세력 대결장소과 분단의 상징이기도 했던 베를린은 이제 통일의 수도로 유럽연합의 핵심 지역으로 부상했다. 또 2차 대전 전범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독일도 이제 유럽연합과 국제사회를 이끄는 핵심 맴버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돈으로 따지기 힘들 정도의 정치적 국민적 발전을 통일을 통해 얻었다는 말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독일 통일의 모습을 조만간 다가올 남북 통일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례가 없어 우왕좌왕했던 독일, 갑작스런 통일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던 독일과 달리, 우리는 앞선 독일의 통일을 통해 그 방법과 이익, 그리고 부작용까지 꼼꼼히 따저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준비가 없는 갑작스런 통일은 독일처럼 재앙적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다며,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기 위해선 무작정 통일비용을 준비하기보다 국내외적으로 통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산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비용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해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통일의 편익은 그 부작용(분단으로 지불해야 할 직간접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는 점을 국민 모두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주변 강대국들의 공감대 형성과 통일 전후 협조를 이끌어내고, 효과적인 경제 회생 방안을 미리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독일 통일에서 엿볼 수 있는 통일 후 사회적 갈등을 막기 위해, 이미 2만 명을 넘어선 탈북자들의 교육을 정교화하고, 통일 과정에서 불가피한 경제적 지출과 이익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작업도 선결 과제다.

통일부 당국자는 ”통일비용 뿐만 아니라 분단비용, 통일편익에 대한 균형된 인식이 필요하다“며 ”독일 통일 후 매년 1000억유로에 달하는 비용만 지나치게 부각된 측면이 있는데, 우리의 경우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는 단기적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는 이상의 편익을 가져다 줄 것이란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란뉴스 최정호 기자/choijh@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