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19, 2010

여리고 작전

영국의 유명한 복음성가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의 작곡자 그래엄 캔드릭(Graham Kendrick)은 예수를 위한 행진(March for Jesus)을 수년 전에 시작하였다. 맨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참여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이 일에 동참하는 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그 수는 15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운동은 다른 나라로 확산되어 브룬디, 필리핀, 브라질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1996년에는 미국에서 하루에 2백만 명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운동이 싱가폴의 페이스 컴뮤니티 침례 교회(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싱가폴을 하나님께 달라고 부르짖는 동시에, 사단이 숨쉬고 역사하고 있는 지역마다 교회가 연합하여 기도로 점령하는 기도 행진(Prayer Walk)운동이 행해지고 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힘찬 발걸음이 지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도 운동의 불길은 오늘만의 모습이 아니다. 나라의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기도의 숨은 헌신자 들이 세계 곳곳에서 나라와 민족을 향한 기도의 손을 들었던 것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24명의 헌신된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 때문에 정치적, 도덕적으로 어두운 유럽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으로 절망 가운데 놓여 있던 유럽이 리즈 하워드의 기도로 전쟁을 마칠 수 있었다. 산마다 계곡마다 부르짖던 한국 교회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 때문에 일제 치하의 치욕을 끝낼 수 있었다. 기도는 시대의 아픔을 치료하는 매개체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이 기도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점령하면서 실제로 체험하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첫 관문 여리고는 이방신과 죄악의 상징이었다. 부와 화려함이라는 겉멋에 취해 죄를 일삼고 하나님을 거부해 온 여리고 백성들을 전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을 돌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는가 보라고 명하셨다. 여리고 작전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직접 경험하는 영적 전쟁이요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능력 선포되는 위대한 시위(demonstration)였다.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가정, 직장, 교회, 나라 곳곳에서 이 싸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의 제단을 쌓고 있는가? 이 기도의 역사 때문에 우리를 옥죄고 있는 사단의 음해와 모함, 분열과 아픔, 갈등과 싸움은 분명히 물러갈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나가는 기도의 손들이 있는 한, 그 기도의 손을 들고 죄악과 어둠의 땅을 밟고 가는 성도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우리는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국가를 여리고 작전의 발걸음으로 다시 밟고 가야 한다. 그래서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기도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이기 때문이다.

운외창천(雲外彰天)의 역설

운외창천(雲外彰天)이라는 말이 있다. 저 구름 뒤에는 맑은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언제가 일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비행에는 그리 지장 받는 날씨가 아니었기에 이륙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노련한 조정사 덕분에 비행기는 무사히 하늘을 날게 되었고 조금 후에는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흐리고 비가 내렸는데 구름 위에서는 맑은 하늘과 강렬한 태양 빛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당장 먹구름이 몰려와 온통 대지를 적셔 버리지만 구름의 고난 뒤에는 맑은 기쁨의 빛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기쁨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구름 아래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흔히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두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첫 번째 관문 '해방의 관문'이다. 주님을 만난 이후 모든 성도는 원인 모를 근심에서 해방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구원의 은총 때문에 죄로부터 오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기를 시작할 때 성도는 비로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버리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붙들려고 했던 것들이 더 이상 소용없어지게 되고,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하챦아 보이기 시작한다. 알수 없는 스트레스로 건강이 약화되던 생활에서 기쁨의 활력을 찾고 실 없이 웃는 경험을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마지막으로 고난의 관문도 통과하게 된다. 원인 모를 기쁨의 시간이 길어질 때 성도는 그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 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구름을 허락하신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있을 때가 많다. 고난은 전에 주신 기쁨의 제공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허락된 구름이다. 저 구름만 뚫고 올라가면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맑은 기쁨의 세계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고난은 구름이다. 구름을 뚫고 가는자와 구름에 주눅들어 인생의 비행기를 띄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구름 저편에 있는 맑은 하늘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아픔과 고난 때문에 주님이 주신 운외창천의 비밀을 맛보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구름은 부딪혀서 깨지고 상하는 관문이 아니다. 우리는 통과 해보지도 않고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주저앉아서 구름을 부수어 버릴 도구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름은 어떤 도구로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 저편을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