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3, 2010

프라미스키퍼스

지금부터 약 10년 전 콜로라도 대학의 풋볼 감독인 빌 맥카트니(Bill MaCartney)는 기독교 체육인 협회에 참석하는 중에 무너진 남성들의 영적인 위치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남자의 역할을 바로 수행하자는 의미에서 프라미스 키퍼스(Promise Keepers) 운동을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친구 데이브 워델(Dave Wardell)에게 나누게 되었고 1년 후 이런 생각과 비전의 결실이 있게 되었다. 기도로 시작한 4,200명의 첫 모임이 이제는 전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98개 스타디움에서 3백 5십만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도 있다.
이 모임이 미국 사회에 호소력 있게 전파되고 있는 이유는 그 동안 미국에서 남성들의 위치가 매우 위축되었다는데 큰 이유가 있다.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자 다음으로 남자의 순서가 매겨질 정도로 전에 볼 수 없었던 남성들의 위축된 사회적 위치 에 대한 반감이 이 운동을 짧은 기간에 확산되어 나가게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갖는 남성의 역할에 대한 기독교적 각성에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아버지의 인도로 집에서 드려지던 가정 예배가 이제는 더 찾아볼 수 없는 골동품이 되었고, 아버지의 자녀들을 향한 신앙의 훈계나 가르침은 먼 옛날 개척시대 청교도들의 이야기로만 들려지는 상황이 되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소중한 사회인 가정에서 남성의 영적 권위와 위치를 되찾자는 이 운동은 많은 미국 남성들에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가정에서 남성이 신앙이 회복되어야 교회와 사회에서 남성의 신앙적 역할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우선 순위를 다시 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순위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이 잘못 된다는 것을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은 단순한 남성들의 가정에서의 권위 회복 운동이기 이전에 신앙의 우선 순위 회복 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직업인이기 이전에 한 가장으로서, 교회의 멤머이기 이전에 가정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는 가정 교회의 목회자로 회복되어야 한다. 일주일에 주일 예배 한번 드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가정에서 자녀들을 둘러 앉혀 놓고 신앙의 예배를 보여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우리는 회복되어야 한다. 나의 인생의 방향이 내가 원하는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으로 결정되는 삶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결혼을 준비하는 기독교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만나고 사귀고 가정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서 세상이 좋아할 만한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기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급한 일보다는 하나님 앞에 중요한 일에 우선 순위가 매겨지는 삶으로 회복되아야 한다. 이것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은 결코 미국 사람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전 삶의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신앙인들의 운동이 될 것이다.

운외창천(雲外彰天)의 역설

운외창천(雲外彰天)이라는 말이 있다. 저 구름 뒤에는 맑은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언제가 일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비행에는 그리 지장 받는 날씨가 아니었기에 이륙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노련한 조정사 덕분에 비행기는 무사히 하늘을 날게 되었고 조금 후에는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흐리고 비가 내렸는데 구름 위에서는 맑은 하늘과 강렬한 태양 빛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당장 먹구름이 몰려와 온통 대지를 적셔 버리지만 구름의 고난 뒤에는 맑은 기쁨의 빛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기쁨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구름 아래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흔히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두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첫 번째 관문 '해방의 관문'이다. 주님을 만난 이후 모든 성도는 원인 모를 근심에서 해방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구원의 은총 때문에 죄로부터 오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기를 시작할 때 성도는 비로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버리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붙들려고 했던 것들이 더 이상 소용없어지게 되고,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하챦아 보이기 시작한다. 알수 없는 스트레스로 건강이 약화되던 생활에서 기쁨의 활력을 찾고 실 없이 웃는 경험을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마지막으로 고난의 관문도 통과하게 된다. 원인 모를 기쁨의 시간이 길어질 때 성도는 그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 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구름을 허락하신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있을 때가 많다. 고난은 전에 주신 기쁨의 제공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허락된 구름이다. 저 구름만 뚫고 올라가면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맑은 기쁨의 세계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고난은 구름이다. 구름을 뚫고 가는자와 구름에 주눅들어 인생의 비행기를 띄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구름 저편에 있는 맑은 하늘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아픔과 고난 때문에 주님이 주신 운외창천의 비밀을 맛보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구름은 부딪혀서 깨지고 상하는 관문이 아니다. 우리는 통과 해보지도 않고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주저앉아서 구름을 부수어 버릴 도구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름은 어떤 도구로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 저편을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역설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

오래전의 영화로 기억이 됩니다. [미션]이라는 영화에는 두 사람의 신부가 나옵니다. 남미의 과라니라는 원주민 촌에 선교사로 들어가 저들과 더불어 살며 섬기고 있는 본당 신부 가브리엘과 노예상인 출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참회의 길을 가기 위해 신부의 길로 들어선 보좌 신부 멘도자입니다.
브라질 이과수아 폭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참으로 맑은 영혼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 과라니 부족을 배경으로 한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화 한것입니다. 당시 세계 여러민족들을 식민지로 점령해 가던 포르투칼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그리고 파라구아이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던 이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손에 넣기 위해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총과 칼을 앞세운 포루투칼 군인의 침략 앞에 대응 그 방식을 두고 가브리엘 신부와 멘도자 신부의 의견이 갈라집니다. 노예상인 출신으로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성격이 과격했던 보좌 신부 멘도자는 칼을 빼어 들고 저들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성당의 책임자였던 본당 신부 가브리엘은 흥분한 보좌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힘이 정의라면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합니다. 결국 신부와 과라니 부족의 원주민들은 거기서 전멸을 하고 맙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선택이었을까요? 멘도자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가브리엘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 앞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공통된 열쇠는 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2: 44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2에서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모든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한가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구체적으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해 나갈 때 늘 붙들어야 할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도 라과니 마을의 신부들 처럼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구체적으로 이 계약서에 내가 사인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몰라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늘 다시금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사랑의 역사를 내가 시작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점검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기뻐하시며 그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