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10, 2011

중국의 몰락

(저자를 알 수 없는 한 블로그에서 인용함)

요즈음 매스컴이나 월드컵 등의 특수와 한류 열풍 등으로 '중국의 시대'가 온 듯싶다. 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는 연일 중국 관련 특집이 지면을 장식하고, 경제인들은 중국 시장을 잡아야만 미래에 생존이 가능하다고 얘기한다. 중국은 이제 먼 '공산주의 국가' 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바로 이웃 나라 가 된 것이다.
20여년 전에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으면서 개혁과 개방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보고 나서는 중국이 다시 사회주의 국가로 퇴보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관심도 조금씩 멀어졌고 중국은 여전히 우리와는 먼 나라였다. 하지만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어느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이들은 앞으로 중국만이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이 책을 지은 '고든 창'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일당 체제의 중국이 결국에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보는 중국은 경직되고 부패한 공산당,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면서 정부의 보조금으로 가까스로 연명하는 국영기업, 부실덩어리인 국영기업을 지원하느라 지급불능의 위기에 빠진 은행,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과 분리주의자들의 불만으로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는 불안한 사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공산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인 중국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분석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인용으로 그때그때 적절한 예를 들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중국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며 활동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은이의 주장-그의 주장이 아무리 뜻밖이라 해도-에 쉽게 반박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저자는 '중국'이 망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유사 자본주의 사회인 중국이 오래 갈 수가 없다고 얘기할 뿐이다.
중국계 미국인 변호사인 고든 G. 창(GORDEN G. CHANG)은 중국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를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철저하게 파헤쳐서 우리들에게 중국이 붕괴할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를 재미있는 소설처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에서 진실을 찾아라(實事求是)." 이 말은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한 말이다. 그는 마오주의(Maoist)의 이 구호를 사용해 마오쩌둥이 만든 중국의 토대를 공격했다. 오늘날 대부분은 사실들이 중국의 밝은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추세대로 가면 중국은 2010년에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실들을 기반으로, 중국은 가까운 미래에 아시아에 이어서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극히 높은 경제성장률과 곱하면 압도적인 거인의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미국보다 3배나 더 큰 강력한 국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림을 얻기 위해 중국이 1978년 이후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 보라. 바로 그때 덩샤오핑이 마오의 유산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즉, 언젠가는 중국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지역에서 주변 국가들을 내몰고 미국을 다시 바다 건너로 쫓아낸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로스 알라모스에서 중국이 핵에 관한 기밀을 도둑질했다고 여론이 들끓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분노뿐 아니라 두려움도 반영하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핵무기로 미국을 겨냥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역사적인 불가피성은 중국 정부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500년 동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이었다. 그 기간에 중국은 문화와 예술, 과학과 교역, 그리고 개척활동을 꽃피웠다.
이어서 유럽 사회가 승리의 나팔을 울렸고 다음에는 미국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이 다시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아주 적절하지 않은가?
외국인들은 그 동안 중국에 대해서 환상을 갖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많은 이들은 중국의 엄청난 잠재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을 땅만 컸지 대단치 않은 나라라며 무시했다.
하지만 중국에는 거대 국가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심정적으로도 자신들의 국가를 거대 국가로 보려 한다. 국가 주석인 장쩌민은 이른바 '대국' 외교를 추진하면서 미국이나 유럽 연합과 함께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겨루고 싶어한다. 그리고 장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켰다.
겉으로 보면 중국은 덩샤오핑이 자신의 나라를 외부 세계에 개방시킨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하고 역동적인 국가로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나라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소위 말하는 중화민국은 겉만 화려했지 속으로는 곪아들어가는, 나아가 붕괴 직전에 있는 약한 나라이다. 우리는 쇠락의 증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이 미친 듯이 추진한 여러 가지 운동들, 이를테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같은 것들은 한때 중국을 광풍 속에 몰아넣었다가 중국인들의 기력을 소진시켰다. 이제 그와 같은 열정은 희망을 약속하는 어느 망명자의 가르침을 수백만의 인구가 따르면서 다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리훙즈와 그가 주도하는 파룬궁을 보면서 1940년대 후반에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마오의 농민군대를 떠올린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당연히 그들과의 싸움이 생존을 위한 것인 듯 행동한다.
중국 공산당에는 불멸의 사명이 있으며, 그것은 늘 중국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당은 어떤 이견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1999년 4월에 파룬궁이 갑자기 베이징에 있는 공산당 본부를 에워쌌을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파룬궁을 금지시키고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하지만 파룬궁은 다시 반격하고 있으며, 회원들은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밖에도 중국 공산당이 싸워야 할 존재들은 많다. 열성적인 신도들, 행동가들, 분리주의자 등등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들의 활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물러설 수도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과 이념은 물러서지 않는다.
중국의 지도자들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또 있다. 공산당 간부들의 부패와 무법적인 통치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이 그것으로, 반대파들의 저항보다 훨씬 더 다루기가 어렵다.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독점한 대가로 인민들의 공동체에 대한 접근성을 잃었다. 그 결과 공산당은 인민들로부터 인기를 잃고 있으며 그들의 삶을 외면하면서 생존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에는 대륙을 방황하는 엄청난 수의 실업자들이 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부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크고 즉각적인 요인이다. 중국에서 일자리가 없거나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어느 때이건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의 인구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그들은 언제 목소리를 낼 것인가?
물론 중국 공산당도 부패와 적대감, 그리고 실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개혁의 시행에는 소극적이다. 공산당은 대부분의 중요한 변화를 거부한다. 따라서 불안정의 근본적인 원인들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티벳과 대만 같은 자신들의 적과 싸우면서 다른 무엇보다 안정을 추구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들은 중국을 구할 수도 있는 변화를 막고 있다.
변화는 필요하다. 경제적인 쇠락의 증후들이 도처에서 목격되기 때문이다. 국영기업은 스탈린식 경제개발과 마오식 사회개발 개념의 산물로서 경제적이지 못하다. 국가가 소유하는 은행들은 그 부실이 너무 심해 세상에서 가장 엉망인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벌써 3년 이상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산처럼 쌓인 재고들이 대차대조표를 흉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다. 외국인들의 투자는 정체상태에 있다. 관료들의 부패는 경제 시스템을 갉아먹고 있으며, 외화는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만일 이것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면, 베이징의 기술 관료들도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해결책이든 먼저 사상적인 검증을 거쳐야만 한다. 공산당의 사상가들은 늘 사회적으로 바른 해결책이 무엇인지 기준을 설정한다.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에 대한 덩샤오핑의 공헌은 이론 때문에 발전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덩의 후계자들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들은 점점 더 커진다. 경제적인 질병은 사회적인 질병이 되고, 그 결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결국에는 해결책이 없어진다. 그러면 경제와 사회, 나아가 정부도 무너지게 된다. 우리는 그 시점에서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중국 정부는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고 있다. 즉, 대규모의 재정적인 자극을 통해 경제를 계속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비용을 어떻게 댈까? 중국의 예산 적자는 지난 몇 년 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거기에다 국가 소유의 은행들이 안고 있는 악성 및 부실 채권을 보태면, 중국의 재정상태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중국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는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중국은 이런 상태를 오래 지속시킬 수가 없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 5년 안에 상황을 바르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기회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특히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막 가입했기 때문에 시간이 더욱 촉박하다. 회원국이 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시장개방을 약속했다. 미국의 무역대표인 샬린 바쉐프스키는 WTO 가입으로 인한 변화가 엄청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WTO 가입은 중국의 토대를 뒤흔들 것이다.
전문가들은 장쩌민 주석의 WTO 가입이 개혁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장 주석은 정말로 극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중국 경제가 WTO 가입으로 야기될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국영기업의 수익성이 개선되리라는 자신들의 분석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정말로 중국의 무능하고 후진적인 은행들이 현대적인 금융기관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이전에도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함으로써 덫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끔찍했던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의 농민들은 마오가 과장된 작물 생산 보고를 맹신함으로써 수천만이 죽었다. 우리는 장주석이 그런 계산착오에 빠지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장 주석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고집하면서 동시에 WTO 가입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능케 하지는 않는다.
그 동안 외국의 기업들은 중국의 WTO 가입에 많은 희망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세계 무역의 발전이라는 그 모든 수사 뒤에는 기대가 숨어 있다. 그들은 더 고른 경기장에서 중국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리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위험에 처해 있다.
현재 공산당과 중국 정부는 13억의 인구를 통제할 수 있다. 거의 매일 실업자, 불만에 찬 농민, 그 밖의 소외계층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지만, 지난 50년 간 유지된 사회구조는 여전히 굳건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중국 정부도 모든 불만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수가 너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점이 되면 그 결과는 심각해질 것이다. 도처에서 통제할 수 없는 저항이 일어나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어떤 정부도 그렇게 많은 국민들의 저항에 견딜 수는 없다.
현재 중국의 지도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덩샤오핑이 직면했던 것보다 더 힘든 것이다. 덩에게는 시간이 있었지만, 장에게는 시간이 없다. 덩의 당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았지만 장의 당은 20년 간의 개혁과 10년 간의 무관심 때문에 약해졌다. 덩은 한 번에 하나의 적과만 싸우려 했지만, 장은 실제적이건 상상적이건 그 모든 적과 싸우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려 하는데, 장에게는 그런 역할을 수행할 시간이 없다.
경제개혁이 지지부진했던 1992년에 덩샤오핑은 그 유명한 남방순례를 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개인적 힘과 비전으로 중국의 길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난 지금 베이징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 덩의 후계자인 장쩌민도 인민들에게 실사구시를 촉구하지만,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합의도 거의 없다.
그 결과 중국 경제의 발전은 더디기 짝이 없다. 전에는 발전이 느려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WTO 가입과 함께 구조개혁의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장 주석이 쉽게 제시한 그 약속들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중국 사회는 해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미래에 대한 합의가 전혀 없이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있다. 중국은 부분적으로만 완수한 이행의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화의 그 모든 혜택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혁의 속도가 느린 사회는 정체된다. 중앙정부의 통제약화로 파괴적인 요인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개혁을 완수할 만큼의 통제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표류하고 있으며, 층분히 빠르게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뒤로 돌아 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덩샤오핑이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을 제거하고 개방을 시작한 1978년 12월 이후 중국은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이 요즘에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중국은 시간과 정치적인 의지만 있으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가령 중국에 30년의 시간이 있다면 모든 것은 제대로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중화민국의 마지막 장을 쓸 때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장쩌민의 조심스런, 때로는 보수적인 개혁정책은 중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적절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는 너무 빠른 개혁의 함정을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중국은 너무 느린 개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 어느 쪽에서든 재앙은 닥칠 수 있다.
마오쩌둥은 불꽃 하나가 대지를 불태울 수 있다고 얘기했다. 다음 번의 불꽃은 엄청난 역사적 화재를 야기시킬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뿐이다

한 성도님의 간증 (2011년 6월 5일)

-목회 칼럼 :
영혼을 위한 불타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들라며 이제부터 나는 주저 없이 금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금식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특별한 영적 참회의 시간이었다. 물과 음식을 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의 탄식을 알리는 거룩한 행위였다. 금식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사생결단의 각오를 불사하는 비장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수 많은 신앙의 성도들은 인생의 큰 위기를 맞이하거나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마다 이 금식의 시간을 갖었다.
내 삶에 있어서도 금식의 시간은 그런 중요한 결단의 시간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주님의 고난을 되새기는 고난주간에도,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목회적인 과정에도, 성도들의 아픔과 고난 앞에에서도 금식의 시간을 자주 갖었던것 같다. 그런데 최근 한 성도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주님이 기뻐하실 금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만난 이후 그 성도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이 전도의 마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사랑하는 지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자꾸 거부하며 냉대해져만 가자, 최후의 수단으로 금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금식하는 이분의 얼굴은 수척해질 수 밖에 없었고 우연히 이분의 얼굴을 보게 된 그 지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무엇인데 저렇게까지 나를 위해 간절히 금식을하는가?” 이 생각은 그렇게도 닫혀 있던 지인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결국 교회의 예배하는 자리까지 나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간증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8:6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나의 기뻐하사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무엇이 흉악의 결박이며 멍에의 줄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는 것인가? 자기 안에 갇혀서 참된 자유와 기쁨도 모른체 절망을 체념하며 어떤 삶의 돌파구도 찾아볼 여력도 업는 자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의 능력이 있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소개하기 위해 애타는 심정으로 금식하며 저 인생에게 새로운 대안을 가르쳐 주기 위해 간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겠는가? 한 영혼을 위해 사생결단하며 금식하는 그 간구앞에 안 열릴 마음이 어디 있으며 안 무너질 인생의 장벽이 어디있겠는가? 영혼을 향한 불타는 마음, 이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일 것이다. 주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 영혼을 위해 내 육체의 한계상황을 드리고 사생 결단하는 금식….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참된 헌신일 것이다. ---------남성수 목사

약한 인간 그러나 강한 성도 (2011년 5월 29일)

-목회칼럼 :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가 한 말중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 라는 유명한 명구가 있다. 과연 진짜 여자는 약한 것인가? 그런데 왜 이말에 자꾸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일까? 나의 경우에 우리 집안에서 아버지보다도 훨씬 강하신 분이 어머니이셨고, 내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속에 늘 용기와 힘을 주며 우리 집안을 묵묵히 지킨 자가 내 아내였기 때문인것 같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말이 여자를 구체적으로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론적인 선포라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보다 강한 여자라도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으로 약한 존재이다. 곰은 6개월을 먹지 않아도 넉넉히 잘 살 수 있고, 뱀은 6백일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며, 북극에서 사는 개들은 그 추운 얼음위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한달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산소 공급이 없이는 8분이상을 버틸 수 없는 참으로 약한 존재이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질그릇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것인가? 인간은 깨어지지 쉬운 그릇이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든 만물을 우리로 하여금 보존하고 땅에 충만하여 살아가도록 그 권세를 부여 받았다. 이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그 사랑아래 있을 때만이 인간은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질그릇은 능력이 없다. 질그릇 혼자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질그릇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인간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파리 루브루 박물관에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모나리자가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비너스는 돌로 만들어진 조각상이지만, 모나리자는 한폭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박물관측에서는 방탄유리를 설치하고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사진도 찍을 수 없다고 한다. 왜인가? 그냥 놔두면 찢어지고 보잘 것 없는 그림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귀하게 보호하니까 전 세계 사람이 와서 일년에도 수천명씩 그림을 구경하지만 전혀 그림이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방탄유리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한 아무도 우리를 깨뜨릴 수 없다. 질그릇은 약하지만 질 그릇을 붙잡아 주시는 능력이 주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있는 한 질그릇은 우리 인생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남성수 목사.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시한부 종말론 (2011년 5월22일)

목회 칼럼 :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한부종말론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이 시대를 탈출하고픈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들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를 탈출하라고 하신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곳이지 도망쳐야 할 곳으로 주신 적이 없다.
한동안 잠잠하던 시한부종말론으로 한인사회와 미국사회가 시끄럽다. 패밀리라디오를 운영하는 헤롤드 캠핑이라는 노인이 2011년 5월 21일을 종말의 날로 선포한 이후에 사람들이 요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요동도 이제 끝났다. 한 미치광이의 무분별한 선포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는지 한편의 코메디를 본듯하다.
캠핑이란 자의 예언의 근거는 창세기 7장 노아의 홍수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7장 4절에서 ‘지금부터 칠일이면…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말씀하신 구절을 인용하여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베드로후서3장 8절을 가지고 7일을 7천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노아시대 홍수가 일어난 BC 4990년에 7천년을 더하니 AD2011년이 되었으며, 성경의 달력으로 홍수가 일어난 이월 십칠은 지금의 5월21일이기 때문에 2011년 5월21일을 종말의 날로 선포했던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예언인가? 무지의 소치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성경해석일뿐이다. 문제는 이런 성경해석에 사람들이 부하뇌동했다는데 있다. 왜 사람들은 이런 무식한 예언앞에 벌벌떨며 두려워 했던가? 종말이 올 때 당해야 할 그 심판의 두려움 때문은 아닌가? 우리 믿는 자들은 종말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종말은 우리의 끝이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종말은 완전한 회복이며 완전한 치유의 시작이다. 이땅에서의 오금서린 피곤과 쟁투를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축복의 출발이다. 이 땅에서 그렇게 바라고 소원했던 몸의 치유도 어차피 육체의 노쇠함을 이길 방법은 없다. 몇년의 시간을 연장할 뿐이다. 그렇게도 소유하고 싶었던 부와 명예도 내 육체의 한계 앞에 한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종말에 육체가 완전히 회복된다. 그렇게도 소유하고 싶었던 황금을 발로 밟고 사는 시간이 종말에 이루어진다. 우리의 아픔과 설움, 고뇌와 번민이 한순간에 해결하는 시간이 온다.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오늘 이 자리를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사는 것이다. 종말의 때와 시는 아무도 알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한속에서 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그때가 언제쯤일지 시대를 가늠할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아직도 세상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저들의 손에 성경이 쥐어지기 위해서는 1500개가 넘는 부족언어로 성경이 더 번역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가 감히 그 날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종말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남성수 목사.

사단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2011년 5월 15일)

-목회칼럼 :
제자훈련을 하다 보면 훈련생들이 제일로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말씀 앞에 매일마다 귀와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큐티훈련이다. 큐티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아무리 가르쳐 주고 강조해도, 그래서 숙제안하면 벌금까지 물게 하는 초강력 수단을 동원해도 안하는 사람은 안해 온다. 오래전에 제자훈련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시작한 그 주부터 마지막 끝나는 주까지 단 한번도 큐티숙제를 안해온 훈련생이 있었다. 그 이전부터 제자훈련을 많이 해 보았지만, 그런 훈련생은 처음이었다. 결석이라도 하면 자동 탈락이라도 시킬터인데, 꼬박꼬박 출석은 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큐티 숙제를 안 해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바쁘다, 피곤하다, 성경을 보아도 잘 이해를 못하겠다’ 하면서 별 핑계를 다 댄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그에게는 한자기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말씀을 들을 귀를 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말씀을 그냥 자신의 호기심과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했지 그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생명의 능력으로 주시는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은 마태복음 13:9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을 듣는 귀를열지 않는 한 그 말씀은 결코 그의 인생에 생명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귀를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게 주어진 말씀들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주어진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안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귀를 열지 않은자이다. 귀를 열지 않는자는 마음의 밭이 돌작처럼 딱딱해져 버린다. 사단은 이런 상황을 사용한다. 사단은 그의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을 금방 새들이 쪼아 먹듯이 빼앗아 가버린다. 결국 그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영국의 C.S 루이스는 [스크류테잎의 편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 말씀을 진진하게 생각하려 할 때마다, 사단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생각해” 라는 말을 들려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금 말씀을 한번 깊이 있게 묵상하고 받아들이려 할 때면 또 다시 “지금 처리할 일도 많은데 나중에 성경읽어….”라고 우리를 회유한다. 이런 사단의 작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기회들을 자꾸 나중으로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이렇게 미루게 될 때마다 사단은 그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외친다. “이번에도 내 작전이 성공했어….”
사단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을 듣는 기회를 뒤로 미루려는 마음이 생길 때, 이순간을 놓치면 사단에 지는 것임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세상의 철학과 잘못된 생각으로 딱딱해진 마음을 성령의 불로 녹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이 순간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단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이다.----남성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