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9, 2010
Thursday, July 8, 2010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
오래전의 영화로 기억이 됩니다. [미션]이라는 영화에는 두 사람의 신부가 나옵니다. 남미의 과라니라는 원주민 촌에 선교사로 들어가 저들과 더불어 살며 섬기고 있는 본당 신부 가브리엘과 노예상인 출신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참회의 길을 가기 위해 신부의 길로 들어선 보좌 신부 멘도자입니다.
브라질 이과수아 폭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참으로 맑은 영혼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 과라니 부족을 배경으로 한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화 한것입니다. 당시 세계 여러민족들을 식민지로 점령해 가던 포르투칼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그리고 파라구아이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던 이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손에 넣기 위해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총과 칼을 앞세운 포루투칼 군인의 침략 앞에 대응 그 방식을 두고 가브리엘 신부와 멘도자 신부의 의견이 갈라집니다. 노예상인 출신으로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성격이 과격했던 보좌 신부 멘도자는 칼을 빼어 들고 저들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성당의 책임자였던 본당 신부 가브리엘은 흥분한 보좌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힘이 정의라면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합니다. 결국 신부와 과라니아 부족의 원주민들은 거기서 전멸을 하고 맙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선택이었을까요? 멘도자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가브리엘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 앞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된 열쇠는 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2: 44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2에서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모든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한가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구제척으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해 나갈 때 늘 붙들어야 할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도 라과니 마을의 신부들 처럼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구체적으로 이 계약서에 내가 사인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몰라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늘 다시금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사랑의 역사를 내가 시작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점검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기뻐하시며 그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브라질 이과수아 폭포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참으로 맑은 영혼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 과라니 부족을 배경으로 한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화 한것입니다. 당시 세계 여러민족들을 식민지로 점령해 가던 포르투칼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그리고 파라구아이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던 이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손에 넣기 위해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총과 칼을 앞세운 포루투칼 군인의 침략 앞에 대응 그 방식을 두고 가브리엘 신부와 멘도자 신부의 의견이 갈라집니다. 노예상인 출신으로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성격이 과격했던 보좌 신부 멘도자는 칼을 빼어 들고 저들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성당의 책임자였던 본당 신부 가브리엘은 흥분한 보좌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힘이 정의라면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합니다. 결국 신부와 과라니아 부족의 원주민들은 거기서 전멸을 하고 맙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선택이었을까요? 멘도자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가브리엘 신부의 선택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 앞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된 열쇠는 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2: 44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2에서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모든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한가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구제척으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해 나갈 때 늘 붙들어야 할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도 라과니 마을의 신부들 처럼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구체적으로 이 계약서에 내가 사인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몰라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늘 다시금 점검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사랑의 역사를 내가 시작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일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점검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기뻐하시며 그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Sunday, July 4, 2010
무슨 재미로 사나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어 냈을 때, 우리는 모두 흥분했습니다. 자랑스런“대-한-민-국~”을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 한국의 위상은 전 세계에 충분히 알려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8강전 진출이 좌절된 이후에도 우리 한국인은 월드컵에 대한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리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축구에열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한(恨) 문화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에게 외세의 침략은 그 긴 세월 만큼이나수도 없이 있어 왔습니다.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략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으로는 왜적의 찬탈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없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근대사에는 일본 제국주의 총칼 앞에, 북한 공산군의 침략 앞에 수도 없는 아픔과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기에 이조 5백 년 동안 내려오는 지연과 학연,출신과 배경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학대하던 민족의 뿌리 깊은 아픔들이민족의 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恨)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이 한을풀어주기 위해 수 많은 해학들이 민간 그룹에서 있어 왔으나 그것은 늘 가진자,권력자들의 억압에 위해 금기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부터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이에 의해서 억압 당하거나, 구속당할 수없게 되었으며, 개방과 자유의 물결은 우리 민족 특유의 한을 풀어버리려는 무엇인가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스포츠가 아닌가 싶습니다.월드컵은 4년마다 우리 민족을 모두 애국자로 만들었으며, 인생의 유일한 재밋거리를 주었습니다. 모두가 경쟁사회에서 피곤해하며 지쳐 있을 때 월드컵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쉬게 해 준 좋은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이제 월드컵이 곧 끝납니다. 벌써 8강전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팀선수들은 일찌감치 한국으로 돌아와 자선경기를 벌이며 쉬고 있다고 합니다.지난 주일에 식사시간에 우연히 옆에 계신 몇몇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월드컵도 끝났으니…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그렇습니다. 월드컵이 우리의 유일한 재밋거리일 때, 그것이 끝나면 살 재미가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민족의 한을 푸는 것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쉬게 해 주는 것도 월드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쁨, 맺힌 한을 풀어 주며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을 때 우리 인생의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에게 우리가 붙어 있어야만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 안에 있을 때만이 인생의 굴곡 앞에 일비일희(一悲一喜)하지 않고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재미로 사는 자들입니다. 월드컵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에게 외세의 침략은 그 긴 세월 만큼이나수도 없이 있어 왔습니다.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략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으로는 왜적의 찬탈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없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근대사에는 일본 제국주의 총칼 앞에, 북한 공산군의 침략 앞에 수도 없는 아픔과 시련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기에 이조 5백 년 동안 내려오는 지연과 학연,출신과 배경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학대하던 민족의 뿌리 깊은 아픔들이민족의 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恨)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이 한을풀어주기 위해 수 많은 해학들이 민간 그룹에서 있어 왔으나 그것은 늘 가진자,권력자들의 억압에 위해 금기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부터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이에 의해서 억압 당하거나, 구속당할 수없게 되었으며, 개방과 자유의 물결은 우리 민족 특유의 한을 풀어버리려는 무엇인가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스포츠가 아닌가 싶습니다.월드컵은 4년마다 우리 민족을 모두 애국자로 만들었으며, 인생의 유일한 재밋거리를 주었습니다. 모두가 경쟁사회에서 피곤해하며 지쳐 있을 때 월드컵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쉬게 해 준 좋은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이제 월드컵이 곧 끝납니다. 벌써 8강전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팀선수들은 일찌감치 한국으로 돌아와 자선경기를 벌이며 쉬고 있다고 합니다.지난 주일에 식사시간에 우연히 옆에 계신 몇몇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월드컵도 끝났으니…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그렇습니다. 월드컵이 우리의 유일한 재밋거리일 때, 그것이 끝나면 살 재미가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민족의 한을 푸는 것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쉬게 해 주는 것도 월드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쁨, 맺힌 한을 풀어 주며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을 때 우리 인생의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에게 우리가 붙어 있어야만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 안에 있을 때만이 인생의 굴곡 앞에 일비일희(一悲一喜)하지 않고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재미로 사는 자들입니다. 월드컵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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