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지내면서 내가 마음 먹은 대로 해본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결정하며 온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있다면 아내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평소에 기도해 오던 대로 신앙의 기준으로 그리고 내가 늘 그리던 여성상의 기준으로 선택하였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나의 그런 선택을 용인해 주셨다. 아마 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그리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외에의 삶의 모든 부분들이 타의반 자의반으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져 왔다.
이것을 칼빈은 예정론이라 했던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의 삶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회상과 감사는 그래서 철이 든 지금에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안에서만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다. 대학을 선택하고 신학의 길을 간 것도, 내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이다. 미국행을 결정하고 막막한 유학생활을 시작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자체이다. 어느 것 하나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의 욕심을 아시고 그것을 꺾는 훈련부터 시키신 것 같다.
열왕기 기자는 바아사를 하나님이 ‘진토에서 들어’ 쓰신 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먼지와 흙 같은 존재 바아사… 그를 들어 쓰시겠다 결심하신 하나님은 결국 그를 왕으로 만드셨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수 있는 왕의 위치에 하나님은 너무도 쉽게 그를 옮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못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라는 우리의 옛 속담은 신앙인들의 삶을 제한시키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폄하시키는 말이다. 우리 신앙인은 쳐다보지는 못해도, 오를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이 필요하다. 늘 나약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는 늘 나무 그늘에 앉아 떨어질 열매만을 기다리는 자이다. 열매는 올라가서 따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바아사는 왕이 되었을 때,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자신은 진토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감격과 확신을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간직 하지 못했다. 역대 왕들의 전철을 똑 같이 밟기를 시작한다. 그는 왕이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유지 되는 줄 알았다. 나무에 오르기만 하면 평생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이 보장되는 줄 착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곧 잊어 버리고 말았다. 한번의 확신이 평생을 갈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매일, 아니 매 순간순간 마다 다시 새롭게 확신하며, 붙들지 않으면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마도 그것을 원하셨던 것 같다. 왕위 자체가 신앙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고 나아가는 그 노력과 열심이 우리의 신앙을 지탱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먼지와 흙 같은 존재 바아사… 먼지와 흙 같은 존재가 어찌 그 뿐이랴! 그러나 먼지와 흙에서 정금 같은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한 삶의 자세는 모두가 다 다르다. 그 하나님을 어떻게 따르며 사느냐에 따라 먼지와 흙 같은 삶을 사느냐 아니며 정금 같은 삶을 사느냐가 갈리게 될 것이다. 정금 같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결심,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이 아닐까?조금만 추워도 벌벌떨고 조금만 더워도 마구 벗어제치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 섞인 삶이 아니라, 추움과 더움에도 굴하지 않고 정금 같은 삶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
Saturday, August 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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