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28, 2010

기독일보 인터뷰 기사

32주년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 남성수 목사http://www.christianitydaily.com/view.htm?id=213399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 남성수 목사
“먼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인지 물어와”
“30여 년 동안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한 방법부터 알아야”
“부흥은 구원의 확신과 사랑을 회복하는 것부터”

교회가 설립된 지 30년 정도가 된 곳에 40대의 젊은 목사가 부임했다. 역사도 오래되었고 성도들의 삶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이곳에 젊은 목사의 부임은 변화와 부흥이라는 과제와 또한 기대로 가득 했을 것이다. 고스란히 목회적 부담을 떠안은 젊은 목사는 열정에 충만하여 휴가를 보낼 겨를도 없이 쉼 없이 달렸다. 주님의 나라와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지쳐있는 목사에게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와 물으셨다. “목사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인지를. 목사는 하나님 앞에 잠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르쳐 주셨다. 지난 30여년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사랑하셨는지.

올해로 창립 32주년을 맞이한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 남성수 목사의 소감이다. 긴 역사에 비해 짧은 3년 반 정도의 목회기간에 대한 소감은 정직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인지 우리교회에 와서 하나님은 물으셨습니다. 목사로서 목회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지치게 되고 또 열심히 한만큼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부터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나’라는 초점에서 ‘하나님’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된 것에는 기도의 힘이 컸다. 남성수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한 달 반 동안 밥 먹는 일 외에는 강대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기도했다. 차츰 동참하는 성도들이 생겼고 목사를 위한 기도의 동역자들도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하루에 세 번씩 자원하여 순번을 정해 기도의 끈이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교회는 ‘다니엘의 기도’라고 명하고 기도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또한 깨달음도 주셨어요. 어떤 큰 과업을 이루기 이전에 ‘남성수’라는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인지 ...하나님은 그것부터 물으셨고 원하셨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죠. 이처럼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모두 물으신다는 것을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며 섬기는지 말입니다.”

30년이 되었든 300년이 되었든, 신앙의 원리는 같았다. 우리 맘속에 구원의 확신과 사랑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바로 잡지 않고 열심만 내는 것은 교회 와서 자신을 해소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깨닫고 그때부터 설교를 통해 사역을 통해 성도들과 나누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도들은 새로운 기쁨과 생명의 능력을 맛보게 되더군요.”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는 순간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감격하여 우는 이들이 예배에 대한 살아있는 간증을 시작했다. 경기불황으로 성도들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도 교회의 재정이 줄지 않고 오히려 선교의 지경을 넒혀가는 일은 성도 개개인에게 일어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배와 함께 또 다른 변화는 소그룹에서도 일어났다. 교제 중심의 전통적인 구역조직에서 ‘동산’이라는 소그룹 사역으로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구역조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성도들로부터 남성수 목사의 소그룹 목회 경험과 노하우가 더해져, 소그룹 사역에 대한 세미나와 회의 등으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진행하고 있다.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고 기존의 구역과 소그룹이 함께 가고 있습니다. 2년 정도 되었는데 기존에서 30% 정도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이 소그룹에서 예배처럼 구원의 감격과 생명의 능력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변화의 수치는 점점 더 높아질 것입니다.”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의 ‘동산’들에는 저마다 소그룹의 정체성을 알리는 ..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그 모든 동산들의 존재이유는 무엇보다 선교와 영혼구원에 있다. 각각의 동산은 결연하고 있는 선교지 및 선교사들과 직접 교류하며 지원한다. 주일예배마다 선교지의 소식을 나누고 기도하는가 하면 동산 모임 자체적으로도 기도하고 후원한다.

“매 주일예배마다 선교사들의 편지를 읽고 함께 기도합니다. 동산들에서 결연한 선교사님들이 한번 방문이라도 하면 가족처럼 대하고 섬기고, 또한 그분들은 큰 위로와 격려를 받고 돌아가지요. 선교지와 성도들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선교지와 늘 함께 호흡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니 그 안에서 받은 은혜의 간증이 넘쳐납니다.”

기세를 몰아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는 2011년 영혼구원에 교회의 역량을 더욱 집중할 계획이다. 마치 돋보기로 태양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듯 흩어진 관심과 역량을 집중시켜 영혼구원의 역사를 불같이 일으킬 원년으로 삼고자 한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필요 없는 것이면 과감히 버릴 것입니다. 한 번의 행사가 아닌 그런 역사를 이어갈 원년으로 삼는 것이죠.”

오렌지카운티한인교회는 ‘비전 21’을 푯대로 삼았다. 제자훈련을 통한 하나님의 일꾼을 양성하고, 소그룹 사역으로 실질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에 ‘비전 21’이다. “많은 제자훈련 프로그램과 소그룹 사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답이 아닙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방법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에 잘 적용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에 앞서 구원의 확신과 사랑을 먼저 회복해야 되듯이 말입니다.”

박상미 기자 [ smpark@chdaily.com

Sunday, October 24, 2010

착각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보면 태어날 때부터 동굴 벽에 비쳐진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손과 발이 묶여 있은 체 한번도 자신의 비쳐진 동굴 벽 외에는 쳐다본 적도 없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굴 밖을 나가본 적도 없다. 이 사람들에게 실제의 삶은 벽에 그려지는 그림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림자가 진짜일 뿐이다. 이들 중에 한 사람이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동굴 밖을 나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밖을 나서 보니 평생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자연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밝게 비치는 태양 빛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밖의 세상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이처럼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있을까! 마침내 그는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이 살고 있던 동굴 속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에게 동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다시 동굴로 들어간다. 동굴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나무와 물과 동물과 태양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경하러 나가자고 제안을 한다. 이 사람은 모두가 자신의 말에 따라 나올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동굴 속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들이 이제껏 살았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고집하게 된다. 동굴 밖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는 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에 비춰지는 자신들의 그림자가 가장 확실한 것이고 자신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에게 있는 참 진짜는 여전히 동굴 벽에 비쳐진 그림자일 뿐이다.
진짜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것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무엇이 진짜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다. 요즘처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가리기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윤리와 전통이 해묵은 것으로 여겨지고 쾌락과 자유가 우리 삶의 가장 유일한 기준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가짜에 속고 있으며 가짜를 진짜인양 착각하고 있다. 건강한 것이 자신의 육체적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재산을 많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자신의 사회적 능력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가정에 평안이 계속된 것을 자신이 가정에 충실한 결과라고 착각하며, 그 동안 맺어온 사람과의 관계가 자신의 친화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당대의 가장 강한 나라 바벨론 제국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권세와 능력이 이를 건설하였다고 생각한 느브갓네살 왕은 이런 착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느브갓네살의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은 꿈을 통해 경고하셨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의 평안과 평안이 장구(長久) 하려면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관자 되심을 인정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 질책하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를 착각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동굴 밖을 나가 보지 않고는 참 진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에게로 향했던 눈과 귀를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우리의 착각을 벗어날 수 없다. 귀와 눈이 하나님을 듣고 보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그림자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춰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을 아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순간이다.

한 여름 밤의 회상

여름밤만 되면 고등부 시절의 설레면서 기다렸던 여름수련회가 생각난다. 교회의 수련회를 갈 때면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 차나 기차 안에서뿐만 아니라 어쩌다 섬 지역을 갈 기화가 있어 조그만 통통배라도 타는 날이면 수련회는 더할 나위 없이 재미와 흥분으로 가득 찼었다. 도시에 살던 나에게 수련회는 자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나를 잊고, 입시 지옥(우리 1.5세나 2세들을 모를 것이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수련회는 유일하게 어린 시절 나의 신앙을 하나님께 다짐하는 의미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늘 자연과 함께 지내는 지금의 미국 생활은 집을 떠나 멀리 가도 옛날 어린 시절의 수련회 기분만은 못한 것 같다. 수련회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거의 잠을 안 자도 좋았던 그 시절.... 짧게 끝나는 것이 늘 아쉬울 따름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수련회 마지막 날은 영적으로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전도사님들의 뜨거운 설교와 밤새워 기도하는 우리의 열정이 한데 어우러지는 영성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우리 가운데 목사도 나오게 하였고, 선교사도 나오게 하였다. 그때 함께 했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들 있을까?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모두들 말이 없었다. 영적 체험의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다가오는 입시의 부담 때문에 앞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걱정에 쌓이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과 걱정이 학생 시절을 지나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시간이 지나도 줄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와서도 이런 불안과 걱정은 계속되었다. 구체적인 어떤 일이 닥쳐진 것도 아닌데 앞날에 대한 막연한 걱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긴 휴가를 보내고 난 후에 닥치는 일에 대한 부담감처럼 어려움 없이 편안한 일상생활을 지내고 있을 때면 이런 부담감이 더 강하에 찾아온다. 이럴 때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터득한 나만의 해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기 쓰는 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일기를 쓸 때만큼은 인생을 관조할 수 있게 되고 생각할 수 있게 되며 부족한 것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일기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일기보다는 목적을 두고 글을 쓰는 일이 많기에 글쓰는 것 자체가 더 부담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지금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을 읽는다.
편안하고 즐거워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날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지 않으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 보다. 왜냐하면 너무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계속되면 인생에 의미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편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곤고한 일 속에서 앞날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따로 가져야 한다. 휴가 마지막 날 정도는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계획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이런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평안하고 즐거울 때마다 가끔씩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삶을 정돈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다. 그런 시간 중의 하나가 바로 고난이라는 시간이다. 고난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하나님이 없이는 전혀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더 크고 강한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고난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이다. 고난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겪어야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꿈이 좌절되는 이유

꿈은 나이가 들어가도 없어지지 않는 젊음의 표상이다. 뛰어난 자신감의 소유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꿈으로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각료회의를 주재하다가 쉬는 시간에 자신이 하늘에서 거대한 합창단을 꾸며볼 생각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1만 명의 소프라노를 세울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당대에 가장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들의 이름을 들어가며 이들을 동원하는 합창단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나는 1만 명의 앨토도 세울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가장 유명한 앨토 가수들의 이름을 또 다시 열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1만 명의 테너를 세울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각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왜 베이스 파트는 안세우십니까?”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 베이스요 베이스는 내가 맡을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뛰어난 자신감의 소유자였다. 깊고 웅장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던 그는 늘 언제나 자신의 모습과 능력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꿈을 언제나 남에게 거리낌없이 나누며 이 꿈을 듣는 이로 하여금 더 큰 꿈과 용기를 가지게 하는 자였다. 루즈벨트는 큰(大) 지도자였다.
예수님은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그냥 묻어 놓았던 자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다.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놓은 자는 위험을 무릎 쓰고 이(利)를 남겨보겠다는 꿈과 자신감이 부족한 자였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작고 보잘것 없지만 이것을 사용해 더 많은 이(利)를 남기는 꿈과 자신감을 가진 자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셨다. 꿈과 자신감은 어쩌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꿈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에 있다. 시도도 해보지 않은 체 그냥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실패를 그냥 감수하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머리의 잣대로 재보다가 더 이상 타산이 안맞으니 안하겠다고 하는 것은 여리고성을 눈앞에 두고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한 8명의 정탐꾼과 무엇이 다르랴! 한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보잘것 없는 고구마 삶는 일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고무마를 삶기 위해서는 젓가락으로 찔러 봐야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인지 아닌지는 전도해봐야 알 것 아닌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그저 복음을 전할뿐이다. 고구마를 찔러 보듯이 복음의 젓가락으로 영혼을 향해 찌르는 일이야말로 꿈과 용기 있는 자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복음은 찌르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 신자는 언제나 젊게 살 수 있는 복음의 특권을 받은자이다. 무엇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에 대한 꿈과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찌르는 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단 꿈을 가진자가 한번 꿈에 대하여 실패하고 좌절할 경우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하는 데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신자는 꿈과 자신감이라는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는가? 우리의 꿈에는 시간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17살 때 가졌던 요셉의 꿈이 13년이라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시험되고 단련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꿈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연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꿈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우리를 바꾸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꿈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 꿈꾸는 자를 정련하실 뿐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의 꿈이 결코 좌절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 정련되어 가는 것임을 곧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