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외창천(雲外彰天)이라는 말이 있다. 저 구름 뒤에는 맑은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언제가 일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비행에는 그리 지장 받는 날씨가 아니었기에 이륙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노련한 조정사 덕분에 비행기는 무사히 하늘을 날게 되었고 조금 후에는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흐리고 비가 내렸는데 구름 위에서는 맑은 하늘과 강렬한 태양 빛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당장 먹구름이 몰려와 온통 대지를 적셔 버리지만 구름의 고난 뒤에는 맑은 기쁨의 빛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기쁨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구름 아래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흔히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두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첫 번째 관문 '해방의 관문'이다. 주님을 만난 이후 모든 성도는 원인 모를 근심에서 해방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구원의 은총 때문에 죄로부터 오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기를 시작할 때 성도는 비로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버리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붙들려고 했던 것들이 더 이상 소용없어지게 되고,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하챦아 보이기 시작한다. 알수 없는 스트레스로 건강이 약화되던 생활에서 기쁨의 활력을 찾고 실 없이 웃는 경험을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마지막으로 고난의 관문도 통과하게 된다. 원인 모를 기쁨의 시간이 길어질 때 성도는 그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쁨의 제공자가 누구 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구름을 허락하신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있을 때가 많다. 고난은 전에 주신 기쁨의 제공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허락된 구름이다. 저 구름만 뚫고 올라가면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맑은 기쁨의 세계가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고난은 구름이다. 구름을 뚫고 가는자와 구름에 주눅들어 인생의 비행기를 띄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구름 저편에 있는 맑은 하늘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아픔과 고난 때문에 주님이 주신 운외창천의 비밀을 맛보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구름은 부딪혀서 깨지고 상하는 관문이 아니다. 우리는 통과 해보지도 않고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주저앉아서 구름을 부수어 버릴 도구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름은 어떤 도구로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 저편을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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